숲이 날아갈 듯 봄바람이 거칠게 불어댄다.
깊이 쌓인 눈은 하루가 다르게 녹아내리며 골짜기에 물이 넘친다.

겨우내 깊은 눈으로 걱정스러웠던 산양을 찾아 하루 종일 산을 누빈다. 해는 기울고 갈 길은 먼데 가파른 비탈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내가 엷게 낀 산은 가까운 듯 멀어 마음은 바쁘고 발걸음은 무겁다. 양지쪽에 눈은 녹았지만 속은 아직도 얼어있어서 아이젠을 신고도 자칫 미끄럼틀이 될 것 같은 비탈길을 더듬어 오른다.
깊이 들여다보이는 숲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찾아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출렁거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를 지나 응달로 들어서자 가파른 비탈을 가로질러 눈 위에 산양 발자국이 길게 이어진다.
산양들이 겨우내 다닌 길인 듯 눈이 다져졌고 눈 오는 날 쉬기에 딱 좋았을 커다란 젓나무 밑에서 한두 마리가 머물다간 듯 했다.

얼어붙은 바닥에는 서성거린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고 겨울철 마른 먹이를 먹고 싼 갈색 똥 한 무더기가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다.

똥을 들여다보며 이 자리에서 쉬었을 잿빛 산양을 떠올린다.
많은 눈이 내린 올겨울 산양들의 삶은 몹시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먹이를 찾기에 눈은 너무 깊었고 깊은 눈은 멀리 옮겨 다니는 것조차 힘들게 했을 것이다.

산양 발자국은 산줄기 너머로 이어지고 비탈을 겨우 올라서는 순간 양지쪽에서 쉬고 있던 한 무리의 산양이 뛴다.
흰 꼬리를 휘날리며 내달리는 어미와 어린 산양 세 마리를 쫓아 눈길은 빨려들고 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뛰는 산양을 따라 숲은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나무들은 춤추는 듯 했다. 골짜기를 가로질러 눈 덮인 비탈을 빠르게 타고 오른 산양이 우뚝 서서 보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깊은 눈 속에서 살아남은 대견함과 고마움, 쉬고 있었을 산양에게 미안함이 뒤엉키며 한걸음만 움직여도 달아나버릴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에 꼼짝 못하고 산양을 바라본다.

갑자기 획 돌아선 산양은 산줄기 너머로 바람처럼 사라졌고 눈에 어른거리는 모습만 아쉬움 속에 남았다.

이렇게 산양을 만나는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고 몸은 가벼웠지만 짧은 만남은 그리움만 더해 갔고 산양을 찾아 산을 헤매게 만들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쪼이며 쉬었을 어미와 새끼 산양들을 떠올리며 언제쯤 설악산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몸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산양, 바람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을 산양, 이런 날들 속에서 산양은 사라져갔고 이제 산양을 찾아 산 속을 헤매고 다녀도 어쩌다 마주칠 뿐이다.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산양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양을 우리가 어떻게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하나 산양이 사는 곳에 가지 않음으로서 산양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뿐이다. 산양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산양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야생의 당당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때까지 자연에 대한 예의와 염치를 갖추고 생명에 대한 존엄을 지켜가야 한다.

모든 생명이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까닭은 생명의 어울림 속에서 서로의 삶이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나무들을 흔들며 휘몰아 내린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햇볕을 찾아 양지쪽으로 나선다,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오후의 엷은 햇빛 속에 앉아 질펀하게 누운 흰 산을 바라본다.

골골이 생명의 소리 가득했고 산양이 지천으로 살았던 잃어버린 풍경을 그리워하며 그 때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설악산이 슬프다. 산양이 뛰어노는 설악산은 그냥 꿈일 뿐인가.
<설악산에서 박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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