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자<돌나라부총재>
우주 大道 부모 효도<고영자(돌나라부총재)>

효도는 우주 도의 기본이요, 근본입니다. 그리고 효도는 우주가 존속하는 이상 영원한 유일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을 보건대 우주 안에 사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심지어 풀이나 꽃이나 나무나 모든 만물들이 다 부모의 모체로부터 나와서 꽃피고 춤추고 노래하고, 가지 치고 열매 맺고 뿌리 뻗고, 자식 낳고 새끼 기르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자기를 낳아 주시고 죽기까지 희생하면서 길러 주신 부모님의 무한하신 희생의 사랑에 대하여 자기 생명이 존재하는 날까지 늘 영원히 감사하고 노래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자식 된 자들의 의무요 도리, 즉 도의 길을 행하는 것입니다.<석선(石仙) 박명호선생님 말씀중에서--->

그래서 공자도 “孝道는 百行의 根本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우주 도의 기본 도요, 이 효도는 또한 우주 유일의 대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 만물의 모체 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효도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우주 유일의 대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의 첫 강의를 우주 기본 도요, 대도인 부모 효도로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새 세상을 상으로 받는 조건의 첫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여기 「너의 하나님」 내가 「네게 준 땅」이 나오는데, 이 땅이 바로 오늘날 세상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라는 것인데 이 땅은 저 하늘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지구, 저주받고 오염되고 더러워져서 도무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이 땅이 태초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당시처럼 새 땅, 새 세상으로 다시 새롭게 바꾸어져서 거룩한 신선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살게 될 불사불멸의 땅, 영원히 행복한 새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자녀들에게 친히 돌비에 기록하여 주신 십계명 중 첫째에서 넷째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지 말고 영생하라는 계명이요, 다섯째에서 열째까지는 인생 자녀들 곧 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여섯 가지 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이 곧 부모를 공경하여 효도하라는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한 차원 더 높으니 「공경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모 공경」 곧 부모 효도는 이 땅의 인생 자녀들에게 죽지 않는 새 세상을 상급으로 주시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즉 부모를 하나님같이 잘 섬겨 효도하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새 세상으로 맞아들이겠고, 부모를 냉대하고 불효하는 자들은 새 세상을 보지도 못하리라는 조건이 달려 있는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새 세상)에서 네 생명(영생)이 길리라. 만약 그리하지 아니하면, 네가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면 내가 불사의 나라, 새 세상을 네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곧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큰 계명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또 말씀하시기를 「만일 …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5:4)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자들을 새 세상으로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

부모님은 보이는 하나님

“부모에게는 다른 아무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저들(부모)의 보호가 위탁된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들(부모)에게 지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어렸을 때에 저들의 자녀에 대하여 부모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도록 정하여 놓으셨다. 그리고 자기 부모의 정당한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자녀)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자녀들 앞에 부모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도록 세우신, 보이는 하나님으로 주신 분들이십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은 세상에 없는 사랑, 곧 하나님만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온갖 것 다 희생하여 주고 되돌려 받지 않는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부모들에게 주시고 당신의 이 땅의 자녀들을 부모들에게 맡기시며 당신을 대신하여 길러 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使者), 하나님의 대리자 곧 보이는 하나님들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내신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누가 밤낮 똥오줌을 가리지도 못하면서 울기만 하는 자녀들을 그토록 조금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면서 끔찍이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자기를 희생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값싼 인간의 사랑이라면 단 며칠도 돌봐 주지도 않고 다 내다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하나님의 대리자들 곧 보이는 하나님들이시라서 끝까지 육체와 정신과 물질, 그리고 영혼의 생명까지 다 희생하시면서 자식을 위해 몸 바치고 가는 보이는 하나님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하나님을 잘 받들어 공경하는 것은 곧 그분들을 보내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잘 받들어 공경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보이는 하나님, 부모를 냉대하고 멸시하는 것은 곧 그분들을 보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냉대하고 멸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로 보내신 보이는 하나님, 부모님을 잘 순종하고 섬긴 효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도 예수도 모르던 옛 시대의 옛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으며, 그들과 그들의 가정에 넘치게 복을 주셨던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을 잘한다고 성서를 들고 다녀도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냉대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천국은커녕 이 땅에 버리사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잘한다고 자랑하기보다는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님을 잘 받들어 공경하는 효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중국의 효자들
중국의 효자 요(堯)와 순(舜)

옛적에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은 천하에 제일가는 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효자 모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왕)로 세우시고, 효자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효자 요셉을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실권을 쥔 총리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중국의 요순, 두 효자들을 중국 대륙의 왕으로 또 세우사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임금은 일찍이 어머님을 여의고 계모를 얻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아버지와 계모에게 받은 핍박과 학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낳은 자식 이상으로 사랑해 주는 착한 계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계모들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 고로 사랑이 가지 않아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설에 아버지가 계모를 얻으면 아버지도 계부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효자의 아버지가, 자기의 생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였는데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온 후부터는 무서운 아버지로 돌변하여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을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너, 아래 헛간 지붕을 나래를 엮어 덮어라.” 명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래 헛간은 아직도 썩지 아니한 지붕인데 새로 엮어 덮으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그러자 효자는 짐작하였습니다. ‘오늘은 아버님께서 나를 태워 죽이시려는가 보구나.’ 그러나 부모님 말씀에 한 번도 거역해 본 일이 없는 이 효자는 불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래를 엮어가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갈 때는 ‘행여나 하늘이 살려 주신다면 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삿갓을 하나 쓰고 올라간 것입니다. 올라가서 한참 지붕을 덮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쪽에서는 아버지가 지른 불이 활활 타오르고, 저쪽에서는 계모가 지른 불이 활활 타올라 삽시간에 사방에 불이 번진 것입니다. 이 효자는 준비했던 삿갓을 오늘날 낙하산같이 붙잡고 뛰어내려 간신히 살아난 것입니다.

이날 아들을 불태워 죽이려다 실패한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서는 “너, 앞터 밭에다가 샘을 하나 파라.” 집 옆에 물이 펑펑 나는 샘이 있는데 또 샘을 파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님이 땅속에 묻어 죽이시려는가 보구나. 지난번에는 지붕에서 뛰어내리기나 했지만 이제는 땅속에서 올라올 수도 없고 나는 꼼짝없이 죽는구나.’ 효자는 알면서 또 부모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샘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동안 깊이 파 들어가다가 아버님이 안 보실 때에는 옆 구멍을 파고, 보실 때는 밑을 파고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 파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와르르 돌과 흙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간신히 옆 구멍으로 기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효자는 뒷방에 살며시 들어와서 평소에 즐겨 불던 퉁소를 잡고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퉁소를 부니 안방에 있던 아버지가 “예끼, 저놈이 또 살아났구나.” 하며 노발대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천하의 효자를 어찌 하늘이 보호해 주시지 아니하고 죽도록 버려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특별히 사랑하시사 인간 아비가 절대로 죽이지 못하게 보호하셔서 저 큰 중국 땅의 임금으로 올려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어진 임금님을 영접한 중국 백성들은 화평하고 복된 나라가 되어 역대의 임금들 가운데 요순시대처럼 가장 살기 좋고 하늘의 평화가 깃들었던 시대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효자의 나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효자들
신라의 효자 손순(孫順)

동방예의지국인 해 돋는 나라 조선(朝鮮), 우리 한국은 예로부터 중국 이상으로 아름다운 효자 효녀들이 많이 살았었습니다. 신라 시대에 손순(孫順)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머님을 모시고 봉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난 중에도 어찌나 효성이 지극했던지 일 년 내 남의 집일을 해주고 사경(품삯)으로 쌀 몇 가마 받아 가지고 오면 오직 어머님만을 위하여 옷과 신발과 반찬을 사 드리기 위하여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어머님께 좋은 반찬을 정성껏 해 드리면 할머니 곁에서 늘 받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손순은 그게 못마땅하여 “어머님, 그 애는 그만 주시고 어머님 혼자 잡수셔요.” 하면 “아니다. 내가 먹는 것보다 더 좋고 기쁘구나.” 하시면서 할머님은 손자를 자꾸 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을 안 효자는 아내를 조용히 집 뒤로 불러서 상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자식은 또 낳으면 자식이지만 부모님은 한번 가시면 그만이신데 저 애가 어머님 맛있는 반찬을 다 빼앗아 먹으니 어머님 입에 들어가는 것이 없소. 그러니 우리 저 애를 산에 갖다 묻고 나서 어머님을 봉양하십시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역시 천하의 효부라, “대체 당신 말씀이 옳군요.” 하면서 두 부부는 아이를 산에 갖다 묻기로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효자 효부인가! 특히나 세상에 남의 부모 섬기기 위하여 자기 자식을 죽이기로 동의할 여인이 누가 있겠는가! 이제 남편은 지게에 연장을 얹고, 아내는 아이를 업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실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기특하셨으랴. 그 광경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산에 오를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크게 망설였으며 그 아내는 감히 참여도 못하였지만, 하나님도 모르는 조선 땅 이방인 두 효자 효부는 인간 어미를 공경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 부부가 하나님을 안다는 아브라함 부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제 두 부부는 산속 깊이, 높이 올라왔습니다. 합당한 장소에 도달하자 지게와 아이를 내려놓고 아버지는 땅을 파기 위하여 괭이를 높이 쳐들어 힘차게 내려찍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 땅을 한 번 찍으니 “웽!” 하고 땅이 영롱한 종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상해서 두 번 세 번 거듭 찍으면 찍을수록 더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다 캐서 꺼내 놓고 보니 아주 훌륭한 종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효자 효부가 아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대신 준비하신 선물이었습니다. 마치 이삭을 죽이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을 막으시고 대신 수양을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 조선의 귀한 효자를 위해 또 이 같은 선물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을 받은 효자는 아내에게 이르기를 “여보, 하늘이 우리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귀한 종을 선물로 주신 것 같으니 우리 아이를 죽이지 말고 이 종이나 가지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도록 합시다.” 남편의 말이라면 언제나 거역치 않는 착한 아내라 같이 집에 내려와서 오막살이 추녀 끝에 종을 달아 놓고 치니 얼마나 소리가 영롱하고 아름답게 멀리 퍼지는지 대궐의 임금님 귀에까지 들린 것입니다.

용상에 앉았던 임금님이 “여봐라, 이게 무슨 소리관데 이토록 아름다운고?” 대신들이 급히 조사한 후에 사실대로 임금님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크게 탄복하며 칭찬하시되 “옛 시대에 곽거라는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식을 묻으려고 할 때 하늘이 그에게 금솥을 주셨더니 지금 짐의 때에 와서는 하늘이 천하의 효자에게 진귀한 종을 주셨도다.” 하면서 어명을 내리기를 “여봐라, 이 천하의 효자에게 크고 좋은 새집 한 채를 지어 주고 매년 국고에서 쌀 오십 석씩 평생을 대주어 그 모친과 자녀로 복되게 살도록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임금님이 주신 집과 쌀이 아니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임금님을 통하여 친히 주신 상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효자는 더 이상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지 아니하고 어머님을 모시고 처자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실제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라의 효자 상덕(尙德)

그다음은 또 신라 때 상덕(尙德)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는데 이 사람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기근 때에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자기 넓적다리 살을 몰래 베어 바쳤던 사람입니다. 또 부모님의 몸에 악종이 생기면 입으로 독을 다 빨아내 낫게 해 드리는 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위하여 임금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살아 있는 효자의 집에 정문을 세우게 하시고 모든 이 땅의 자녀들의 본이 되게 하셨으며 매년 후한 상금과 쌀을 대주도록 하셔서 그 효자의 가정을 행복하게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한갓 꾸며 낸 옛이야기가 아니요, 바로 우리 전시대에 우리와 같이 이 땅에서 살았던 효자들의 실제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이조시대 효자 도(都)씨

이조 철종왕 때 도(都)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 역시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효성이 극진하였습니다. 어머님 봉양할 돈이 없으므로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 장날마다 팔아서 어머님께 쌀과 생선을 사다가 봉양하는 효자였습니다.

하루는 장에서 숯을 팔아 어머님 드릴 고기를 사서 지겟다리 위에 매달아가지고 숲이 우거진 산 고개를 넘어오는데, “쉿!” 소리가 등 뒤에서 나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큰 솔개 한 마리가 지겟다리에 매단 고기를 낚아채가지고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소리쳐 봤지만 이미 고기를 낚아챈 솔개는 번개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습니다.

그 고기는 다음 장날이 올 때까지 어머님 드려야 할 반찬이었는데, 호주머니에 돈만 있다면 당장 되돌아가 고기를 다시 사 오련만 효자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없는지라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빈손으로 뵈올 생각과 반찬 없는 맨 진지를 어머님께 해 드릴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혀 눈물만 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솔개도 야속도 하구나. 하필이면 가난한 내 고기, 늙으신 어머님 드릴 고기를 채갈 것이 무언고!” 하면서 수십 리 길을 울면서 터벅터벅 맥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광경을 다 지켜보시고 계셨던 하나님, 옛날 엘리야를 위하여 까마귀를 보고 명하사 엘리야의 식탁을 차리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천하의 효자의 고기를 낚아챈 솔개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솔개야, 너 누구의 고기를 물고 왔느냐? 네가 물고 온 고기는 천하의 효자의 고기란다.

그러니 너는 그 고기를 한 점도 먹지 말고 효자의 집 안마당에 가져다가 떨어뜨려 주고 오려무나.” 하셨습니다. 솔개는 그제야 그 고기가 어떠한 고기인 줄 알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사실도 모르고 수십 리 길을 징징 울면서 집에 도착한 효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산 고개에서 잃어버린 고기는 솔개가 다 먹어 치운 줄만 알았더니 집 안마당에 그대로 떨어뜨려 놓고 간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필시 하늘의 도우심이라.’ 효자는 하늘을 향하여 몇 번이나 거듭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의 세월이 지난 후 그처럼 귀히 받들어 모시던 어머님이 임종이 가까운 병환으로 누우신 것입니다. 효자의 안타까운 마음은 어찌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병석의 어머님께서 “얘, 홍시가 먹고 싶구나.”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감이 없는 겨울철이라 집안에는 물론 온 동네 집집마다 다녀 보았으나 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저장 기술이 발달되었지만 저장 기술이 없는 옛날에야 감이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나 효자는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이므로 어찌하든 홍시를 구해 드리려고 망태기를 들고서 혹시나 하여 감나무 밑에마다 찾아다니며 막대기로 낙엽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혹시 떨어져 말라 있는 홍시가 한 개라도 발견될까 하여서였습니다. 이 동네 감나무 밭, 저 동네 감나무 밑을 뒤적거려 보았으나 한 개의 감도 발견하지 못하고 해만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한탄만 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에 산에서 호랑이가 엉금엉금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다른 때 같으면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을 것이지만 이날은 어찌 된 일인지 말만 듣던 호랑이가 실지로 나타났는데도 무섭질 않고 무슨 개나 말이 가까이 오는 것같이 마음이 포근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사 보내신 사신(使臣)이므로 피차 친근하기가 옛날 엘리야와 까마귀같이, 다니엘과 사자들같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하나님)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호랑이는 효자에게 가까이 오더니 엎드려서 자기의 꼬리로 자꾸만 등허리를 타라는 듯이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효자가 알아차리고 올라타니 호랑이는 비호같이 달려 산을 몇 고개를 넘더니 큰 부잣집 대문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벌써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효자가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부르니 큰 대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주인장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말하기를 “지나는 객이온데 길 가다 날이 저물어 들렀으니 하룻밤만 유하여 갈 수 없겠소?” 하고 청하니 인심 좋은 시골 주인은 반갑게 영접하면서 “우리 집에 방도 많고 사랑채가 비어 있으니 들어오셔서 편히 쉬어 가시오.”라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밤중쯤 되었을 때입니다.

“손님, 손님!” 주인이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오늘이 자기 아버님 제삿날인데 음식을 좀 잡수라고 깨웠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는 제삿날 손님이 왔을 경우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습니다. 눈을 비비고 들어오는 음식상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상 위에 자기가 그토록 헤매며 찾았던,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인 홍시가 한 접시 있는 것이 아닌가. 효자는 놀랍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주인은 의아하여 물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효자는 호랑이를 타고 온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인은 자기의 무릎을 탁 치며 “그러면 그렇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손님이 물으니 “내가 우리 아버님 제사를 위하여 해마다 감 2백 개씩 저장을 해두면 다 곯고 물러 터져서 겨우 칠팔 개 정도 남아 아버님 제사상(床)에 놓을 한 접시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오십 개나 싱싱하게 남았으므로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라, 하늘이 당신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셔서 바로 천하의 효자, 당신에게 주시려고 이렇게 오십 개나 안 썩도록 보존하여 주셨으니 이 감들은 다 당신의 것이오.

그러니 염려 말고 이 상 위의 감은 잡수시고, 나머지 것은 모두 그릇에 잘 싸서 담아 드릴 테니 가지고 가셔서 자당님을 봉양해 드리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감을 얻게 된 효자는 병석에서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 생각으로 그 밤을 남의 집에서 자질 못하고 밤중에 작별하고 대문 밖을 나왔습니다. 나와 보니 아까 태워다 준 호랑이가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올라타니 비호같이 달려 순식간에 자기 집 문 앞에다 내려 주고 호랑이는 산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게 되었다는 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우리와 같이 이 땅 위에 살았던 앞 시대 사람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 것입니다.

까마귀에게 부탁하사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곰에게 명하사 엘리사를 조롱하는 자들을 혼내 주게 하시고, 솔개에게 명령하사 효자의 고기를 날라다 주게 하시고, 호랑이에게 명하사 효자를 태워서 홍시를 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심같이 또한 사랑하는 이 시대 효자 효녀들을 또 새 세상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이 땅에서 보이는 하나님을 극진히 섬긴 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거나 똑같아서 반드시 새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주신 첫 계명에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외로도 하나님 책의 많은 곳에 거듭거듭 약속하셨습니다. 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비록 효자들이 유․불․선 도(道)를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친히 함께 동행하시며 소원에 넘치는 이적을 베풀어 주시고 온갖 복을 다 내려 주신 사실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 약으로 아들을 솥에 삶은 효자

어느 시골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리신 것입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백약이 무효라 한탄하고 있는 중에 어떤 도인이 지나면서 처방을 내려 주기를 “당신의 어머님 병환은 어린아이를 삶아 드려야 낫는 병이라오.” 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처방치고는 어려운 처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효자는 자기 집에 마침 어린 아들이 하나 있으므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여보, 자식은 또 낳으면 자식이지만 어머님은 한번 가시면 그만이신데 우리 아이를 어머님 약으로 쓰도록 합시다.” 이때 남편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한 아내는 즉시 승낙하여 동의하는지라, 그때 마침 칠팔 세 된 아들이 건넛마을 서당에 글을 배우러 간 사이였습니다.

아내는 큰 가마솥에 물을 한 솥 부어 끓이고, 남편은 서당 간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으므로 마중을 나간 것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귀여운 아들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버지, 오늘은 웬일이세요? 제 마중을 다 나오시고요.” 하면서 귀엽게 말합니다. “오늘은 네가 그냥 보고 싶어서 나왔지. 아버지 등에 업혀 가자.” 하고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집에 와서 불을 때고 있는 아내에게 눈짓을 하니 아내가 솥뚜껑을 열어젖히는 동시에 아버지는 아이를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집어넣어 버리고 솥뚜껑을 닫아 버렸습니다.

부부는 말 없는 침묵 가운데 불만 때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예쁜 아들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당에 다녀왔노라고 인사하며 또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네가 어찌 된 일이냐?” 하고 급히 솥뚜껑을 열어 보니 솥 속에는 커다란 동삼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효자를 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부모를 위해 희생시킨 지극한 효성에 크게 감동하사 친히 준비하신 큰 산삼을 갖다 주심으로 효자의 아들을 구하시고, 어머님 병은 낫게 하심으로 효자의 가정에 큰 복으로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 모리아산에서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바치려 하던 아브라함에게 수양을 대신 준비해 주시고 아들 이삭을 구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곳에서도 똑같은 일을 다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 크게 은총 받은 효자의 가정의 귀여운 아들은 예쁘게 자라서 훌륭하게 되었고, 산삼 물을 잡수신 어머님은 질병이 깨끗하게 나아 아주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장수하셨으며, 아들과 어머니를 다 얻고 하늘의 축복까지 넘치게 받은 두 부부는 세상에 없는 행복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게 되었습니다.

 
신 거꾸로 신은 부처

이제는 불효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한 시골 동네에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과부가 어린 외아들과 단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이 과부에게 있어서는 이 어린 아들이야말로 남편 겸 아들로 오직 의지할 자기 생명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맛있는 것이 생기면 아들만 주고 자기는 궂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은 아들만 입히고 좋은 신발은 아들만 신기고,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아들이고 나쁘고 못쓸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만 기른 아들은 점점 자라서 다 큰 아들이 된 후에도 이 아들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으레 자기가 먹고 입고 쓸 줄만 알고 어머니는 아주 못쓸 것만 드리면서 구박, 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이 그렇게 할 때 기가 막혀서 눈물로 서러운 날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업자득으로, 자기가 그렇게 아들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 왔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을 기를 때에 과일이건 음식이건 무엇이건 좋은 것은 부모에게 드리도록 하고 궂은 것은 자기들이 먹고 마시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불효자가 어머니께 상의도 없이 산골 논다랑이를 다 팔고 개똥밭 서마지기까지 다 팔아가지고 한양으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야 굶든 돌아가시든 상관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효자식을 막을 길이 없는 어머니는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며 고개 너머로 사라지는 무정한 자식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싸늘하게 식은, 아들 없는 빈방으로 돌아왔습니다.
한양에 도착한 불효자는 한번 큰돈을 벌어 보려고 이런 장사 저런 장사 여러 가지를 해보았으나 웬일인지 하는 것마다 다 손해나고 망하는지라 홀어머니가 고생 고생하면서 모은 재산을 몽땅 날려 버리고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불효자는 왜 이렇게 팔자가 사나운지 점이나 쳐 보자 하여 아주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마지막으로 점이나 치려고 간 것입니다. 점쟁이 앞에 복채를 놓고 나니 첫마디 하는 말이 “오, 당신은 하는 것마다 다 실패했군요. 당신은 돌아가서 신 거꾸로 신은 부처님만 잘 위하면 만사 대통하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옳다, 됐다. 나는 이제 운이 트이려나 보다.’ 좋아라 희망을 가지고 나와서 이제는 깊은 산에 있는 절마다 찾아다니면서 승려들에게 “이 절에 신 거꾸로 신은 부처가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런 부처는 가는 데마다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수군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천지에 신 거꾸로 신은 부처가 어디 있담?” 하면서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불효자는 한탄하기를 “나는 팔자가 왜 이다지도 사나운고! 이제는 신 거꾸로 신은 부처도 못 만나겠구나.” 하면서 탄식하였습니다. 이제는 돈도 떨어지고 신발도 떨어져 더 이상 찾으러 다닐 수도 없게 되어 굶주린 창자만 움켜쥐고 그토록 구박했던 어머니가 계신 시골 오두막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몇 날 며칠을 얻어먹으면서, 굶으면서 집에 도착하니 밤중이었습니다.

이제 불효자는 싸리문을 두드리며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떠날 때는 늙으신 어머니야 굶든 돌아가시든 상관 않고 상의 한마디 없이 배신하고 떠나 버린 불효자식이 이제 갈 곳이 없으니까 다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싸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아들의 음성을 들은 어머니는 “오, 네가 살아왔구나. 돌아왔구나.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하시며 허둥지둥 뛰어나와 싸리문을 열어 주시고는 “얼마나 고생했느냐? 얼마나 시장하냐?” 하시면서 자식의 밥상을 차려 주시기 위하여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본 불효자식의 눈에 어머니가 신발을 거꾸로 신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불효자식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하, 신 거꾸로 신은 부처님은 바로 집에 계신 우리 어머니셨구나.’ 하고 그동안 불효막심했던 모든 잘못을 눈물로 뉘우치고 그날부터 어머니를 부처 섬기듯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신발,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 생기면 언제나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어머니께 먼저 드리고 어머니를 먼저 입히고 어머니께 먼저 바치고, 꼭 부처 모시듯 온갖 정성과 사랑을 오직 어머니께만 쏟았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으며 가정은 천국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사업을 하든 손대는 것마다 만사형통, 운수 대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큰 부자가 되었고 장가도 들어 어머님을 모시고 아들딸 많이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옛 성현의 말씀에 “子孝雙親樂(자효쌍친락)이요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이라.”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두 부모는 즐겁고 가정은 화평하게 되며 집안 만사는 다 형통하게 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성서의 진리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잠23:25, 엡6:3).

우리도 복 받고 잘되기를 원할진대 부모님, 곧 보이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처럼 온전히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시대마다 효자들에게 큰 복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또 큰 복을 주실 것이요, 성서의 약속대로 불사 나라, 새 세상을 유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불효 아들과 효성스런 손자

한국 고려장(고린장)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한 곳에 불효자식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들어 장성한 아들까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불효자가 자기 아들을 보고 “너, 오늘은 할머니를 지게에 져다가 저쪽 산 깊숙이 버리고 오너라.”

그때는 나이 많으신 부모들을 저마다 산에다 져다 버리고, 토굴 속에 가두는 일이 예삿일이었기 때문에 드디어 이 집에도 그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부터 손자 사랑은 할머니라, 그토록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손자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시던 할머니, 자기도 제일 사랑하여 따르는 할머니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하여 지게에 져다가 깊은 산속 짐승들 밥으로 버려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손자는 아버지의 명령에 어찌할 수 없으므로 “예” 하고 사랑하는 할머니를 지게에 지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손자는 얼마만큼 가서 산의 양지쪽 따뜻한 금잔디 위에 할머니를 조심히 내려놓고는 말씀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와이”
“여기 조금만 기다리고 계셔요. 그러면 제가 금방 다시 모시러 올게요.”
“그러마, 아가.”
할머니를 양지쪽 잔디 위에 내려놓은 손자는 빨리 집을 향하여 지게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확인을 합니다.
“할머니 버리고 왔느냐?”
“예, 아버지, 버리고 왔습니다.”

아들은 대답을 하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할머니를 져다 버린 헌 지게를 정성껏 아래 창고 벽에 달아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앉아 있던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까짓 헌 지게도 버리고 오지 뭐 하려고 정성껏 달아매느냐?”
“아니에요. 이 지게를 잘 두어야 아버지 늙으시면 또 져다가 버리지요.”
이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습니다. ‘큰일 났다. 저놈이 내가 늙으면 틀림없이 저 지게로 나를 져다가 버릴 터인데….’ 눈앞이 깜깜해 오는 것입니다.
“얘야, 빨리 가서 할머니 다시 모셔 오너라.”

이렇게 해서 착한 손자의 효성으로 할머니가 구제 받은 이야기입니다. 어른 불효자식은 어린아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옛말에 제 자식은 열 자식이라도 그 자식들이 똥오줌을 다 싸대도 더럽다 아니하고 귀엽다고 기르면서 부모는 둘뿐인데 늙어 콧물, 눈물이 조금 나오면 더럽다고 한 상에서 밥도 안 먹으려고 하고 구박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자식을 기를 때 고생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欲報深恩(욕보심은)이 昊天罔極(호천망극)이라.” 은혜를 보답코자 할진대 하늘과 같이 넓고 커서 다 갚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자님도 교훈하시기를 “부모님이 살아 계시거든 공경하기를 다하고, 부모님을 봉양할 때는 즐거운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고, 부모님이 병환 중에 계시면 근심을 다하여 간호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여 애통하고, 부모님 제사 때에는 엄숙함을 다하여라.” 또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멀리 놀러 가지도 말고, 혹 갈 때에는 반드시 장소를 말씀드리고 가라.”

또 “부모님이 부르시면 즉시 대답하되 입에 밥을 넣었을 때는 그 밥을 즉시 뱉고 ‘예’ 하고 달려가라.”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자는 자기도 도로 효도하고 순종하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이요, 부모님께 불효하고 거역하는 자는 자기도 도로 불효하고 거역하는 자식을 두게 되리라.

만약 그것을 못 믿겠거든 추녀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라. 먼저 떨어진 물방울 자리에 영락없이 뒤에 물방울이 또 떨어지는 것이다.”
성언(聖言)에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권위에 대한 멸시는 얼마 안 가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멸시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째 (부모 효도) 계명의 의무를 축소하려는 이 세상 신, 마귀 사단의 노력이 생겼다.”

부모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은 곧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이요, 부모님께 대한 멸시와 거역은 곧 하나님께 대한 멸시와 거역이 되는 것임을 잘 아는 이 세상 신, 사단은 세상의 자녀들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부모를 냉대하고 거역하도록 충동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타난 보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 보이는 하나님만 거역하고 대적하게 하면 자연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이 땅의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에게 불효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은 자기의 밥이 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도 예수도 모르고 성서도 모르지만 부모님을 잘 섬겨 효도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새 세상에서 불사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가 생긴 이래 종교를 가졌든 안 가졌든, 어느 나라이건 어느 민족이건 간에 효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으며 그들에게 소원에 넘치는 이적과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또 성서 역사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 큰 부르심을 받았던 각 시대의 모든 믿음의 선지자들도 오직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성이 지극한 효자들만 부르셔서 쓰셨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불효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불러 쓰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성서의 효자들
효자 모세

성서 오경을 기록한 모세는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부모를 떠나 종교가 다른 잡신만 섬기는 나라, 애굽 궁전으로 갔지만 열두 살 때까지 부모님이 부탁하신 말씀, “모세야,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에게 경배하면 안 돼요.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해방시킬 목자가 될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부디 잊지 말아라. 모세야, 응?”

“네, 알겠습니다. 엄마 말씀, 아빠 말씀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어린 모세는 부모 곁을 떠나 애굽 궁전으로 불려 갔습니다. 그 화려한 궁전에서 수십 년의 생활이란, 소년 모세 때로부터 청년 모세, 장년 모세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유혹과 매혹들이 그를 사로잡으려 했고 핍박도 컸지만 이 모세는 어릴 때 부모님께서 교훈으로 주신 말씀을 오직 마음에 간직하고 순종하기로 결심함으로 승리했던 것입니다.

어린 모세는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애굽의 사치와 환락을 물리칠 수가 있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애굽의 다른 신들에게 무릎 꿇지 않게 되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이성 문제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애굽의 황금과 보좌를 버릴 수가 있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이스라엘의 인도자, 하나님의 대선지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백이십 세가 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열두 살 때 부모님이 부탁하신 말씀을 오직 순종하다가 세상을 떠난 천하의 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크게 사랑하사 최고의 아들로 큰 영광과 특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효자 엘리야, 엘리사

이들 엘리야와 엘리사야말로 그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세상과 어울리지도 아니하고 세상의 나쁜 친구들과 놀지도 않았으며, 오직 가정에서 부모님 말씀만 순종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과 집안일에 열중하여 예쁘게 순종하던 귀한 효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착한 효자들을 부르사 우주 대왕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명자, 대선지자들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효자 다윗

다윗의 형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잘 놀러만 다녔지만, 어린 다윗은 아주 착실하여 아버지 명령만을 따라 형들이 돌보지 않는 양떼를 착실히 돌보는 어린 효자였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아들들이 많았지만 큰 아들들이 양떼를 맡으면 다윗같이 착실히 돌보지 아니했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순종 잘하는 다윗에게만 늘 양떼를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택하사 잘난 형들을 다 제쳐놓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효자 요셉

요셉은 이복형제들과 달라서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순종하기를 다윗과 같이 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감옥 총리와 바로의 총리가 되기 앞서 자기 가정에서 아버지께 가장 신임 얻은 가정 총리였습니다.

그가 거친 이복형들의 손에 의하여 죽음같이 무서운 타국의 노예로 팔려 갈 때에도 그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를, 어디를 가든지 아버지의 교훈대로 오직 아버지의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여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교훈을 순종하다 보니 신임 받는 감옥 총리가 되었고, 아버지 말씀을 순종하여 아버지의 하나님을 경외하다 보니 여인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바로왕의 선생으로 자랄 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다 보니 애굽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지혜로운 총리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바로는 보좌의 주인이었지 경제와 정치의 실권을 쥔 왕은 요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 부모의 교훈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이 효자를 영광스러운 아들로 부르사 어디를 가든지 함께하셔서 큰 은총과 영광으로 옷 입혀 주셨던 것입니다.

효자 다니엘과 세 동무

다니엘과 세 동무는 그 이름들만 보아도 그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히 그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교육시켰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으로서 하나님 외로는 어떤 신의 심판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경배하지도 말며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는 부모들의 소원의 이름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부모들은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가는 어린 아들들의 손을 잡고 당부 당부하였습니다.

“죽더라도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다가 영광되게 죽어라. 알았지?”
“네, 아버지. 네, 어머니.” 하고 부모님과 작별한 이 네 소년들은, 모세와 같이 수없이 많은 유혹과 핍박들이 바벨론의 화려한 궁전에서 그들에게 몰려왔지만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있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음식의 부절제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으며,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사자 굴에 또는 불 가운데도 뛰어들어 승리할 수 있는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하의 효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사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의 계시들을 다 가르쳐 주셨고, 그들에게 최고의 영광과 영예를 주셨던 것입니다.

효자 침례 요한

침례 요한은 대제사장 성직자의 아들로서 마땅히 다른 친구들과 같이 선지자 학교, 오늘날 신학교를 가야 할 사람이었지만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타락한 신학교를 저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들어가서 농사일과 집안일만 착실히 했던, 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효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늙으신 성직자요, 어머니도 늙으셨으므로 집안일과 농사일은 그가 혼자 다 맡아서 하였던 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이끌어 내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7:28)라고 칭찬하시며 최고 선지자의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던 것입니다.

효자 예수님

예수님은 또한 천하의 효자이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하신 적이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시면서까지 어머니를 못 잊어 제자 요한에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부탁하신 예수님, 죽기까지 부모님을 공경하시고 자기 생명보다도 더 어머니를 사랑하시고 염려하신 예수님은 천하의 효자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부터 내 대신 네가 잘 모시기를 부탁한다.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하나님께서는 이 효자를 기뻐하사 인류의 구세주로 높이셨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어릴 때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하는 불효자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구세주로 결코 쓰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수수천 년 역사 동안 구약 때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오직 효자들만을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된 사업을 맡기셨습니다. 그중에 불효자는 단 한 명도 부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천하의 불효자 광규(石仙)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효자를 사용하신 적이 단 한 번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광규(石仙)를 불러 쓰신 것입니다.

광규는 수천 년 역사의 선구자들의 대열에 낄 수도, 설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마지막 때 온 세상 앞에 하늘의 대진리의 빛을 환하게 비춘 후에 새 세상으로 가게 될 마지막 거룩한 무리의 대열 가운데 한 아들로 불러 주시고 맨 뒷자리라도 끼워 주셨다는 것이 바로 부모에게 불효한 광규를 쓰셨다는 송구스런 사실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불효만 했던 자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런 마지막 사업에 참여자로 불러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보리죽과 보리밥을 많이 먹고 자랐습니다. 보리죽을 먹게 된 것은 보리밥을 넉넉히 해먹을 수 없는 식량 사정 때문에 보리를 좀 더 아껴 먹기 위하여 보리를 갈아서 멀겋게 죽을 끓여 먹은 것입니다.

그 보리죽에 짠 배추김치를 놓고 먹는 것이 왜 그렇게 맛이 있었던지, 나는 일생에 어느 잔칫집에 가서도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에 우리 집이 보리죽을 쑤어 먹은 것은 가난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은 동네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동네 제일가는 부자가 왜 보리죽을 먹었느냐 하면 농사지은 쌀은 모두 팔아서 논을 사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논 사는 재미로 보리죽을 쑤어 먹은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할아버님께 삼대독자 외아들이셨는데 조부님께서는 돈을 많이 가지고 계시면서도 난리가 날 것이라고, 땅 사야 소용없고 돈을 가지고 피난 가야 한다고 논밭을 하나도 사지 아니하시고 돈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그만 집에 화재가 나서 돈을 다 태워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아들 하나인데도 유산 하나 물려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적수성가(赤手成家), 맨주먹으로 가정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부모님들은 남달리 생활력이 강한 분들이셨습니다.

두 분은 다 성격이 강직, 강인하셔서 어떤 어려운 일과 궁핍이 닥쳐도 일생을 사시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나 도움을 청하시는 일이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가훈은 정직과 근면과 알뜰(검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걸인과 중들이 오면 밥과 쌀을 아낌없이 한 그릇, 한 바가지씩 퍼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칠 남매로 아들 사 형제, 딸 삼 형제로 자랐는데 네 살, 다섯 살만 되면 아버님께 천자문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적어도 한두 권의 한문책을 떼고 들어갔습니다.

우리 칠 남매는 자라면서 허영이나 사치 같은 것은 글자도 몰랐고, 우리 가훈이 정직이었기 때문에 남의 것은 지푸라기 한 개라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알고 정직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말씀이라면 절대 순종하는 형제들이었습니다. 형님들은 나이가 오십이 넘어 늙어 가시면서도 아버님께 무엇이든지 여쭙고 상의드리지 않고는 무슨 사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들이 번 돈으로 자기들의 땅이나 점포나 집을 사는데도 꼭 아버님께 여쭙고 사는 효자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형제들 틈에서 칠 남매 중 여섯째로, 아들 중에는 셋째 아들로 자랐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순종을 잘하여 거의 꾸중을 모르고 자라났다고 어머님이 늘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양말 한 짝 찾아 신겨 주는 법이 없이 자랐어. 초저녁에 잘 때 머리맡에 옷과 버선을 차곡차곡 정돈해 놓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신고 입었기 때문에 너는 말시필 일이 없었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한 가지 우스운 일이 기억납니다. 5, 6세쯤 되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그때에는 과일도 없고 밭에 심어 놓은 오이가 왜 그렇게 먹고 싶었던지 냄새조차 향긋한 것이 쳐다보기만 하여도 침이 삼켜졌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달려가서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나 오이 한 개만 따먹을게요.”

“안 돼. 저녁에 아버지 반찬 해 드려야 해.” 그러시고 부모님은 형과 누나들을 데리고 모두들 일하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 혼자 집안에 떨어져 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놀고 있으려면 생각나는 것은 오이밖에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오이 밭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연초록 오이들이 여기저기 밭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더욱 침이 삼켜집니다. 식구들은 다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나만 오이 밭에 혼자 서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따먹어도 볼 사람이나 알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아침에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신 그 말씀 한마디 때문에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오이 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누워 있는 맛있게 생긴 오이를 내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꼭 눌러 봅니다. 연한 오이의 살점이 엄지손가락 손톱 끝으로 파져서 나옵니다. 손톱 끝에 달린 작은 오이 살점을 혀를 내밀어 이빨 끝으로 꼭 씹어 보니 향긋한 것이 오이 맛이 납니다.

“아, 됐다.” 앉아서 계속 손톱으로 눌러 찍어 맛을 봅니다. 그러다가는 그것도 별로 신통치 않아 집으로 힘없이 돌아와서 혼자 놉니다.

저녁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님이 저녁 반찬 하기 위하여 오이 밭에 가 보니 오이들이 몇 개가 곰보가 된 것입니다. 손톱자국 길이를 보니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광규야!” 부르시는 어머님 소리에 “예” 하고 달려 쫓아가면 “아가, 네가 얼마나 오이가 먹고 싶었기에 이렇게 만지다가 갔느냐? 여기 있다. 이거 하나 먹어라.” 오이를 하나 뚝 따 주십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좋아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때같이 맛있는 오이는 평생 두 번 다시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면서도 그러한 정직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한다는 가정의 자녀들은 그 이상으로 정직하여야 하며 입에 거짓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도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28:24)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것이라고 해서 부모님의 호주머니에서 동전 한 개라도 몰래 꺼내 쓰는 것은 분명한 도적질인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돈이나 먹을 것이나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여쭈어 허락을 받고 정직하게 먹고 써야 할 것입니다.

새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은 마음과 입술에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사람들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자녀들이 어디를 가든지 믿을 수 있는 정직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커서 중학교 다닐 때에도 여름철에는 온 가족이 보리밥만 해먹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 거의가 다 보리밥들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학교 가는 내 도시락에는 반섞이 밥이라 하여 보리밥 할 때 쌀을 솥 한쪽에다 따로 올려놓아 특별히 도시락을 싸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가서 도시락을 풀어놓고 친구들과 먹으려 하면 밥이 안 넘어갑니다. 아침에 보리밥을 잡수시던 아버님 생각이 자꾸 나서 쌀이 섞인 도시락밥이 목이 메어 안 넘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조금 먹다가 다시 도시락을 덮어 싸가지고 저녁때 와서 저녁 보리밥상을 받으시고 잡수시려는 아버님 상 위에 “아버지, 오늘 도시락 먹기 싫어서 안 먹었어요. 아버지 잡수셔요.” 하고 내놓으면 아버님이 잡수십니다.

아버님이 잡수시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님께서 겨울철에 산 고개 너머로 놀러 가셔서 주무시고 오실 때에는 밤새 내린 눈이 아버님 신발 속에 들어가면 발 시리실까 봐 새벽 일찍이 일어나서 아버님 오실 길을 죽가래로 눈을 치우고 가서 아버님을 모셔 오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은 잘 표현은 안 하셔도 매우 흐뭇해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이렇게 순종함으로 사랑만 받고 자라던 아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 때부터 아버님 말씀을 완전히 거역하는 불효자가 된 것입니다. 신앙하지 말라 하시면 여전히 하고, 성일을 지키지 말라 하시면 또 지키고, 성서 버리라고 불태우시면 또 구해다 보고 하니 아버님은 심히 당황하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순종만 하고 칠 남매 자녀 중에 가장 꾸중 안 듣고 자라난 아들이 신앙을 가짐으로 불효막심한 자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도 그토록 심했던 것입니다.

내가 부모님께 가출당한 것은 모두 네 차례였습니다. 나는 집에서 너무 순진하게 자랐기 때문에 집을 떠나면 살지 못하는 줄만 알았는데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의지하니 집에서 쫓겨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와서는 형님 댁으로 가서 살기도 했고, 그다음 두 번째는 누님 댁에서 오라 하므로 그곳에 가서 상점을 봐 주면서 살았습니다.

맨 마지막 네 번째 가출당한 때는 군대 제대한 뒤였는데, 그때는 철이 든 나이라서 그런지 이웃들 보기에도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맨주먹으로 쫓겨난 나는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온 것뿐입니다. 길을 걸을 때나 앉을 때나 하나님께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때가 바로 초여름이었는데 어느 교우 형제가 여름철 냉차 장사를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한 후 장사하는 둘째 형님 가게에 가서 돈을 조금 빌려다가 어떤 사람이 장사하다가 팔려는 냉차 구루마를 하나 샀습니다. 그 당시 한 잔에 5원, 10원 하는 냉차 장사를 해보려고 산 것입니다. 신앙이 아니면 부잣집 아들이 상상도 못할 부끄러운 직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남부끄러워 냉차 구루마 곁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손님 하나가 와서 냉차 달라고 찾으면 마지못해 달려가서 한 잔을 팔고서는 다시 곁에 있는 친구의 구멍가게로 피하고, 또 손님 하나가 오면 할 수 없이 나가 팔고 또 피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제일 인기 끄는 냉차 장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까지 나와 함께하셔서 여러 가지 귀한 축복과 신기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면 재미있겠으나 지면상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름이 지나서 더 이상 냉차 장사를 할 수 없으므로 직업을 잃은 나는 또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하였습니다. 집에서 곱게만 자라난 나는 아무 수단도, 기술도 없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혼자의 힘으로 뚫고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계실 뿐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고향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아무도 모르는 지방에 가서 하나님 하나 나 하나, 하늘 하나 나 하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고향에서 너무나 많은 핍박과 고통과 수치스러운 일들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영영 고향을 떠나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에 가면 혹 고향 사람이나 친구들을 만날까 봐 생전 가 본 적이 없는 전라도 땅 이리시로 일단 가 보기로 한 것입니다.

거기 가서 마음에 안 들면 또 정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우선 이리를 향하여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섭리는 그곳에 내가 정착하도록 붙드시므로 얼마 동안 그곳에 있기로 하고 이리시 번화가 극장 앞에서 땅콩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겨울철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장사를 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도 함께하시고 축복하셔서 이리시 교우들 중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극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건전치 못한 노랫소리와 극장 찾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장사를 했지만, 내 마음과 양심을 늘 지켜보셨던 하나님께서 산 증인으로 계시지만 나는 양심에 털끝만치도 죄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매 분초마다 하늘과 연결된 기도의 생애가 매일 매 순간의 내 생애였습니다.

그다음 나는 군고구마 장사도 해봤고, 헌 실로 짜내는 공장의 제품인 내복과 도꼬리 장사도 사방 도시를 다니면서 해봤습니다. 그다음 성서 연구 서적 판매도 해봤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혹독한 겨울날 해가 져서 어두워지므로 빨리 돌아오려고 지름길로 온다는 것이 길가 논에 파 놓은, 인분이 가득 찬 구덩이에 빠져서 매섭게 추운 겨울날 기차에 매달려 몇 시간씩 추위에 떨며 고생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고 다녔지만 나를 핍박하고 쫓아낸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들이 너무너무 불쌍하기만 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어떤 분의 소개로 천안에 있는 한 고아원에 가서 얼마 동안 봉사하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가 보니 고아가 240명이 넘는, 작은 시골 초등학교만큼이나 큰 고아원이었습니다.
내 직책은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맡았던 자리로서 고아원 전체를 새벽과 밤에, 그리고 일요일 낮 예배를 인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고아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시무하던 목회자들은 고아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아들을 다루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제일 나이 어린 사역자란 소리를 들으면서 고아들과의 생활에서 완전히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일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세수도 씻겨 주고, 코도 닦아 주고 하여 고아들이 나만 나타나면 졸졸 따랐고 내 말이라면 모두들 잘 들었습니다.

사랑은 몽둥이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아원에 있을 때 하늘의 사랑을 내 일생에 제일 많이 깨닫고, 매일 그 무한하신 사랑을 생각하며 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산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면 하늘 영광이 내 주위를 둘러 비추는 듯한 느낌을 체험하며 매 순간 하늘이 나와 같이 동행하고 계심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집을 떠난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거칠고 험한 세상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일과 밑바닥 직업들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우리 구세주의 수고와 고생과 고독과 가난을 맛보았으며, 세상의 가난하고 외롭고 궁핍한 사람들의 사정도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에서 자비와 동정과 긍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가 경험한 일들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 품팔이도 해보았고, 떠돌이 행상인도 되어 봤고, 길바닥에 앉아서 남의 신발을 기워 주는 구두 수선장이도 되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 무슨 고생을 할지라도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신앙을 반대한다 하여 집에서 스스로 내가 먼저 나온 적도 없습니다. 오직 부모님이 쫓아낼 때에서야 나왔습니다. 부모님이 쫓아내지도 않는데 부모님이 신앙을 반대한다 하여 스스로 부모님을 배신하고 나오는 것은 불효자식입니다.

우리는 비록 부모님이 신앙을 반대하고 핍박해도 끝까지 그 부모님을 받들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쫓아내면 그때는 할 수 없으니 나와도 되는 것입니다. 나는 크게 나눠 네 차례 쫓겨난 것이지 작은 핍박까지 따지면 더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낮에 이불을 짊어지고 쫓겨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밤중에 자다가 쫓겨난 적도 있으며, 어떤 때에는 여름철에 쫓겨나서 갈 곳이 없어 성전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잠이 들면 모기가 얼마나 얼굴을 물어뜯는지 아침에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를 쳐다보니 기도실 천장에 공기통이 크게 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붕 천장 속에 있는 모기가 다 내려와서 내 얼굴을 뜯은 것입니다. 그런 기도실에서 여러 날을 자면서 목회자 사택으로는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로 인해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다녔지만 나는 부모님께 설 때와 추석 때, 그리고 생신 때가 되면 꼬박꼬박 편지를 써서 내가 번 적은 돈과 같이 편지를 부쳐 드렸습니다. “아버님, ○○ 날이 아버님 생신입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여 주시고 잡수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사 잡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늘 보내 드렸습니다.

그러면 내 편지를 받으신 아버님은 “누가 제 놈보고 돈을 보내랐느냐?” 하시면서 돈을 방바닥에 던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의 속 심정과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본심이 아니요 가족들 앞에 그냥 던지시는 것뿐이지 속마음으로는 아들 걱정으로 못 견디게 괴로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아버님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고향 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일생 동안 눈물을 모르시는 아버님, 어린 자식이 죽어서 손수 갖다 묻고 돌아오셔도 눈물 없이 밥을 드셨다는 아버님께서 나 때문에 소리 내어 우시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나와 어머님은 이쪽 방에 있고 아버님은 아버님 방에 계신데 일생에 처음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들 넷 중에 너에게 제일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불효막심한 자식이 될 줄 몰랐다.” 하시면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핍박도, 시련도 능히 다 이길 수 있었지만 이 시련만큼은 참으로 이기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당장 아버님 방에 뛰어 들어가 “아버지, 이제는 신앙을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 우시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막 일어나려 했습니다. 나는 이 마지막 시험에서 간신히 견디어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것은 사실이나 하늘에 계신 하늘 아버지 이상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상반될 경우에는 우리는 하나님 편을 좇으면서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님을 살리는 길이요, 부모님께 대한 진정한 효의 길인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그래서 나도 그 시간 동안 부모님과의 가슴 아픈 투쟁을 하다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아버님은 나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면서 결혼시켜 주고 재산을 줄 테니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님께 나는 한 가지 조건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셋째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까? 만약 저를 꼭 결혼시키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부모님이 저와 같이 사신다면 제가 결혼을 하고, 같이 사시지 아니하신다면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부모님을 꼭 모시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은 “그 문제는 결혼한 후에 논하기로 하고 일단 결혼이나 해놓고 보자.”

이리하여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버님은 신앙하는 며느리를 쾌히 승낙하시고 수백 리나 되는 남원 교회까지 오셔서 예식에 참여해 주시고 사양하는 결혼반지와 예물까지 강권하여 해주시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결혼 후 한 달 만에 우리를 분가 내주셨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님을 떠나 분가 나온 우리 부부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정성을 바쳤습니다.

회갑 날이 돌아왔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보다 생활이 풍부한 형님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아버님 시계와 두 분의 금반지와 성서를 각각 선물해 드렸습니다.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사치용 반지를 끼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하나님을 모르시는 부모님들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부모님께서 이해하실 때까지 반지 정도 선물해 드리는 것은 합당하고 현명한 일인 것입니다.

어느 독실한 처녀가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가서 먼저 시아버님 담배쌈지를 예쁘게 만들어 드린 후에 1년 365일 매일 아침마다 큰절을 올리고 나니 하루아침에는 시아버님이 며느리보고 “아가,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며느리는 공손히 대답하기를 “예, 제 소원은 아버님께서 저희와 같이 신앙하시고 하늘 가시는 것입니다.” 하니 시아버님이 “오냐, 알았다. 오늘부터 내가 네 말대로 하겠다.” 하시고는 며느리 보는 앞에서 자기 무릎으로 긴 담뱃대를 딱 분지르고 며느리가 만들어 준 담배쌈지도 불태우시고 아들, 며느리 이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부모님들께 술이나 담배나 그 밖의 해로운 것을 사 드려서는 안 되겠지만 그 외 해가 되지 않는 것들로는 무엇을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다음에 자녀들의 효성에 감동을 받으신 부모님들이 후에 깨달은 뒤에는 모든 해로운 것은 스스로 뉘우치고 자연히 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들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믿는 자녀들의 효성스러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지나치게 의인 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의(義)는 오직 사랑이요, 참된 의인(義人)은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받들고 돌보아 정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께서는 드디어 나의 중심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이 신앙하면서 아버님을 거역한 것은 그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요 하늘의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함이었고, 오히려 부모님께 대한 효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 것입니다.

역시 사랑은 승리하였습니다. 마음에 감동을 입으신 아버님 방에 나는 혼자 들어가서 이렇게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아버지, 제 평생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무어냐?”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전도회를 일주일 동안 하는데 아버지께서 일주일만 참석해 주시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러마. 내가 참석하겠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허락이었습니다. 그토록 완고하신 아버님께서 교회에 나오셔서 전도회를 참석하신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님 마음은 돌이키셨지만 애석하게도 그 전도회에서 아버님은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하심으로 하나님을 영접치 못하신 채 그냥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아무도 들어가 자지 않는 아버님의 관이 안치된 방에 마지막으로 영원히 헤어지는 아버님과 하룻밤을 같이 자고 싶어 들어가서 관을 끌어안고 마지막 하룻밤을 아버님과 같이 잔 후에 아버님을 떠나보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가지신 모든 자녀분들이시여! 부디 여러분들은 광규와 같은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지 마시기를 부탁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옛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어버이 살아 계실 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사랑하는 독자님들이여!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기회가 있을 때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께 효도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광규와 같이 영원히 기회를 잃고 후회하는 자녀들이 될까 심히 염려하는 바입니다.

먼저 보이는 하나님께 효도하라

우리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가 되기 앞서 먼저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 앞서 부모님을 가장 잘 섬기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계 안에 교역자나 평신도나 마음 다해 하나님 잘 섬긴다고 하면서 보이는 하나님께는 소홀히 하고 불효하는 실수들을 많이 저지르는데, 이러한 신앙은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전6:6) 살면서 신앙을 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도 없고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앞서 보이는 하나님을 먼저 극진히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유․불․선 도(道)를 모를지라도 보이는 하나님, 부모님께 극진히 효도를 다한 자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으며 친히 동행하시고 새 세상 주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다섯째 계명에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새 세상)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옛날 유대인들은 부모님께 효도하라 하면 말하기를, “부모님 섬길 것을 다 하나님께 바쳤다.”고 핑계를 대고 부모님께 불효함으로 그들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룻 같은 이방 여인은 시부모님께 지극한 효성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사랑받아 구세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불사영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국왕이나 대통령은 엄격히 존경하고 높이면서 부모님은 소홀히 하고, 주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나 법왕, 승려들은 높이 받들면서 부모님께는 함부로 대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뒤바꿔진 큰 잘못이요 타락입니다.

부모는 대통령이나 목사나 법왕보다 훨씬 더 높임과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에게 몸과 생명을 전달해 주신, 보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계명 중 첫째 계명에 주의 종을 섬기라거나 왕을 공경하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에게는 다른 아무도”, 목사, 승려, 대통령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저들(부모)의 보호가 위탁된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들(부모)에게 지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어렸을 때에 저들의 자녀에 대하여 부모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도록 정하여 놓으셨다. 그리고 자기 부모의 정당한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

옛날 고려장(고린장)하던 시대에 어느 불효자식이 자기 늙으신 어머니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산속에 버리기 위하여 지게에다 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중에 지게 위에 앉으신 어머니는 자꾸만 솔가지를 꺾어 땅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불효자식은 지게 위의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게 핀잔을 줍니다.

“어머니, 왜 죽으러 가면서 괜히 솔가지를 꺾는 거욧?” 그래도 지게 위의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없이 솔가지만 계속 꺾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산중 깊이깊이 들어가서 늙으신 어머니가 두 번 다시 자식 집에 찾아오실 수 없을 험한 산중에 도달했을 때에 불효자식은 지게를 받쳐 세웠습니다.

그 곳은 맹수들만 우글거리는 깊은 산중이었습니다. 불효자식은 지게 위의 어머니를 내던지다시피 하고는 인사도 없이 홱 돌아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깊은 산중에까지 오시면서 말 한마디 없으시던 어머니가 입을 여셨습니다.
“얘야, 잠깐만.”
“왜 그래욧?”

“이곳은 깊은 산중, 사나운 짐승들만 많고 길도 험하여 찾기 힘든 곳이라서 혹시 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이 어미가 솔가지를 꺾어 던져 놓았으니 너는 그 솔가지대로만 따라가면 너희 집까지 무사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길 잃지 말고 잘 가서 어린것들과 잘살거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 이 어떠한 기막힌 어머니의 사랑인가! 이런 어머니(부모)를 저버린 자식을 하늘이 어찌 천벌을 내리지 아니하실 것이며, 이런 부모님께 효도한 자녀들에게 어찌 불사의 새 세상을 상급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이 어머니의 거룩한 사랑은 비단 그 어머님만이 가지고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모든 부모님들, 바로 우리 집안에 계신 부모님도 이와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낳아서 길러 주신 분들이십니다.

이러한 부모를 배신한 자식들을 어느 하나님께서 새 세상으로 데려가실 것이며 불사의 생명을 주시겠는가? 우리는 하늘 갈 생각 말고 먼저 부모님을 공경할 것이요, 영생을 탐내지 말고 먼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기 앞서 먼저 부모님을 순종하는 착한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오직 부모님께 지극히 효성스러운 효자들만을 골라 택하시고 부르셔서 영광스러운 사명자로 쓰시고 불사영생하는 나라를 상급으로 주셨습니다.

「자녀들아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영생)하리라」(엡6:1-3).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새 세상)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우리에게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우리로 생명을 받게 하시고 사랑과 희생으로 길러 주시어 불사의 새 세상까지 유업으로 받게 하여 주신, 고마우신 우리 부모님들께 영원한 감사와 경배를 드립시다.

<詩>
백조의 일생

백조는 오직 새끼 위해 알을 품다가
젊은 날의 앞가슴 예쁜 털도 다 빠져 버렸고
백조는 이제 갓난 새끼들 위해 멀리 고기를 잡으러 떠났다네

그러나 그물도 낚시도 없이 입으로만 고기를 어떻게 잡나
온갖 힘 다 기울여 간신히 고기를 하나 잡고 보니
먹음직도 하구나

오랫동안 굶주리고 지친 엄마의 창자
고기가 먹고 싶어 군침이 나오지만
집에 두고 온 새끼들 생각에
엄마는 그냥 가지고 집에 돌아온다네

새끼들만 먹이고 자기 배 제대로 채우지 못한 엄마 백조
이렇게 여러 날 동안 새끼를 키우고 나니
엄마 백조는 마를 대로 마르고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버렸다네
그러기를 한 배, 두 배, 세 배 …… 새끼를 몇 해를 키우고 나니
엄마 백조는 기진맥진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네

추운 겨울 오기 전에
수만 리 남쪽 나라 옮겨가 살아야 하는데
엄마 백조는 힘이 없고 어지러워 갈 수가 없다네

엄마 백조는 새끼들 모아 놓고
상냥하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작별하기를
“얘들아, 엄마는 이곳에 남아 혼자 살 테니 너희들은 저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들 살려무나” 거듭거듭 타일렀다네

새끼들 떠나보낸 엄마 백조는
며칠 남지 못한 자기 생명 위하여
찬 서리 홀로 맞으며 연못가 논두렁 힘없이 끼웃거리며 먹이를 찾다가
아무도 모르는 언덕 밑에서 마지막 새끼들 잘되기만을 오직 빌고 또 빌면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숨을 거두었다오

그러나 새끼들은 뒤에 남은 엄마는 생각지도 아니하고
저희끼리 깔깔대고 웃으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자기들만의 행복을 찾아서 멀리멀리
남쪽 나라로 모두들 날아가 버렸다네
뒤에 남은 엄마는 이미 숨진 것도 모르고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엄마 백조는
평생을 자식 위해 먹지 못한 텅 빈 배
그러나 가슴은 자식 위한 사랑 한 아름 가득히 안고서
만족한 미소 머금고 앉아 있는 거룩한 백조 엄마의 모습이여

이것이
아름답고 사랑 많은 백조 천사의 거룩한 일생이라오

                                                           돌나라(十誡石國總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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