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의 시간을 사수한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의 교암산지구 전투에서 1개 중대병력을 이끌고 중공군 연대병력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교수 육군 대위를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1953년 7월 휴전조인을 앞둔 상황에서 적은 이른바 ‘7·13공세’라고 하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 왔다.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에 위치한 교암산의 금성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한 중공군 최후 공세도 그중 하나였다.

7월 13일 21시 적은 교암산 전초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암산은 제6사단 2연대 1대대가 방어를 담당하였고, 그 전방 능선에는 2대대가 3개 중대로 전초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적은 먼저 최전방에 있는 제7중대에 공격을 가한 다음 1시간 후 2개 대대로 제6중대와 제5중대를 공격하였다.
적의 병력은 4개 대대로 증강되었으며 곧이어 김교수 대위가 지휘하던 제6중대에서는 진내전이 전개되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적의 포화는 그 강도가 더해갔고 적의 병력도 급속도로 증강되었다. 1개 연대 규모 이상의 적이 제6중대를 완전포위하게 되자 중대를 지휘하던 김교수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에게 동굴로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각적인 아군 포병의 진내사격이 제6중대 진지인 ‘가’고지를 강습하였고, 제6중대가 포진한 능선에서는 피아간의 일대 혼전과 함께 전사상 유례가 드문 대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김 대위는 모든 중대원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한 치도 물러나지 말고 적을 무찌르도록 격려하며 진두지휘하였다.

적을 향해 몸소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진지를 사수하던 김대위는 그러나 적진으로부터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을 복부에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중대장을 잃고도 7~8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던 중대원들은 결국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 전사하였고, 단 6명만이 생환하였다.

교암산의 전투 전초진지인 ‘가’고지전투는 약 3시간 동안에 87,000발의 포격을 받으면서도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상대로 8시간이나 진지를 사수하고 적 1천200명을 사살하는 대 전과를 거둔 치열한 방어전투였다.

지리적인 악조건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와해된 상황에서도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아군의 안전한 철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이는 화천 방향으로 철수한 병력이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반격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중공군 제199사단 주력 연대의 파상공격을 맞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일진일퇴의 혈전을 벌이다 전사한 김교수 대위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전 군의 귀감으로 삼았다.
<허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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